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후서 6:14-7:1)
오늘의 말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우리말성경)
6:14 여러분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의와 불법이 어떻게 함께 짝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하나가 되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함께 몫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행할 것이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6: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그들과 떨어져 있으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6:18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들이 될 것이다. 전능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히 거룩함을 이루면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합시다.
배경 설명
오늘 본문은 읽는 순간 어딘가 낯섭니다. 바로 앞 6장 11-13절에서 바울은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14절은 갑자기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7장 2절에 가면 다시 “여러분은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라는 간청으로 돌아옵니다. 6장 13절에서 7장 2절로 곧장 건너뛰어도 글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이 단락은 오래전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습니다. 바울이 앞서 따로 쓴 글의 조각이라는 견해도 있고, 바울이 일부러 이 자리에 넣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단락은 고린도후서의 일부로 전해졌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읽습니다. 그러니 바로 앞의 간청(좁아진 것은 내 마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11-13)과 이어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말이 아무에게나, 아무것에나 문을 열어 두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 단락이 보여 줍니다.
먼저 “멍에를 함께 메다”라는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멍에는 두 마리 짐승의 목에 함께 얹어 한 쟁기를 끌게 하는 나무 틀입니다. 구약에는 소와 나귀를 함께 묶어 밭을 갈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신 22:10). 힘도 걸음도 다른 짐승을 한 멍에에 묶으면 고랑이 비뚤어지고 둘 다 지칩니다. 레위기 19장 19절에도 서로 다른 종류의 가축을 섞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데, 헬라어 구약성경(칠십인역)은 거기서 바울이 오늘 쓴 말과 같은 뿌리의 단어를 씁니다. 바울은 이 오래된 농사 규정을 사람의 삶에 가져옵니다. 한 멍에에 매이면 결국 같은 방향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마주한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는 신전이 즐비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상인들의 모임, 동업자 조합, 집안의 잔치가 신전이나 우상 제물을 중심으로 열리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우상의 신전에서 먹는 문제를 길게 다루었고, “여러분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21).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멍에를 우상 숭배와 얽힌 관계, 곧 신앙의 방향이 갈리는 일에 함께 묶이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 구절을 결혼 문제로만 좁혀 읽는 경우가 많지만, 문맥은 그보다 넓습니다.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바울은 같은 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세상의 부도덕한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5:9-10). 믿지 않는 사람이 식사에 초대하면 가도 된다고 했고(고전 10:27),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떠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고전 7:12-14). 그러니 오늘 본문은 믿지 않는 이웃과 담을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어긋나는 것에 함께 묶여 끌려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14-16절의 다섯 질문은 모두 “어떻게”로 묻습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다섯 쌍이 나란히 놓이면서 점점 구체적이 됩니다. 원칙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사람에서 예배의 자리로 좁혀 들어옵니다. “벨리알”은 구약 히브리어에서 쓸모없음, 사악함을 뜻하는 말에서 왔고, 후대 유대 문헌에서는 악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옵니다.
16절은 이 모든 질문의 근거를 밝힙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우상의 신전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도시 한가운데서 모이는 작은 공동체를 향해, 진짜 성전은 바로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고린도전서에서도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렀고(고전 3:16-17),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 불렀습니다(고전 6:19). 이어지는 인용은 레위기 26장 11-12절과 에스겔 37장 27절의 약속을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광야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던 약속이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17-18절도 구약 여러 곳을 겹쳐 놓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나와 떨어져 있으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이사야 52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원래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에게 이제 그 땅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는 흩어진 백성을 모아 받아 주시겠다는 에스겔 20장 34절의 약속과 울림이 겹칩니다. 18절의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는 다윗의 자손에게 주신 사무엘하 7장 14절의 약속을 닮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아들”에 “딸”을 더해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 43장 6절이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을 함께 부르는 것과 닮았습니다. 한 왕가에 주어졌던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7장 1절이 이 단락을 묶습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바울은 금지로 끝맺지 않고 약속으로 끝맺습니다. 그 약속은 앞의 인용 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겠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가 되겠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합니다. 그것도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 곧 몸으로 하는 일과 마음 깊은 곳 양쪽에서 말입니다. “거룩함을 이루면서”라는 말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 이루어 가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전체의 흐름은 고린도후서 개론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쉽게 풀어보는 주요 단어
- 멍에를 함께 메다: 원어 헤테로쥐게오. “다른”이라는 말과 “멍에”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서로 다른 것끼리 한 멍에에 묶인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옵니다.
- 불법: 원어 아노미아. 법이 없는 상태, 곧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의와 정반대 자리에 놓입니다.
- 사귀다: 원어 코이노니아. 무언가를 함께 나누는 깊은 사귐입니다. 바울이 성도의 교제를 말할 때 즐겨 쓰는 말이어서,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이런 사귐이 있을 수 없다는 질문이 더 날카롭게 들립니다.
- 짝하다, 몫을 나누다: 원어 메토케, 메리스. 같은 것을 함께 가진다는 뜻입니다. 동업자처럼 한 몫을 나누어 갖는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 하나가 되다(15절): 원어 쉼포네시스. 소리가 어울린다는 뜻으로, 우리가 아는 “심포니”와 같은 뿌리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한 화음을 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 하나가 되다(16절): 원어 쉰카타테시스. 함께 한 표를 던진다, 뜻을 같이한다는 말입니다. 성전과 우상은 같은 쪽에 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 벨리알: 히브리어에서 쓸모없음, 사악함을 뜻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후대 유대 문헌에서 악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 성전: 원어 나오스. 성전 건물 전체라기보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가장 안쪽 처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거하다, 행하다: 원어 엔오이케오, 엠페리파테오. 직역하면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걸어 다닌다”입니다. 잠시 들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한가운데서 함께 지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영접하다: 원어 에이스데코마이. 문을 열고 맞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떠나 나오는 사람에게 돌아갈 품이 있다는 약속입니다.
- 더러움: 원어 몰뤼스모스. 얼룩이 묻어 더럽혀진 상태를 말합니다. 7장 1절은 이 얼룩이 몸에도, 영에도 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거룩함: 원어 하기오쉬네. 하나님께 구별되어 그분께 속한 상태입니다. “이루면서”라는 말과 함께 쓰여 날마다 완성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해볼 표현
-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6:14)
- 멍에는 혼자 지는 짐이 아니라 둘이 함께 걷게 하는 도구입니다. 한쪽이 방향을 틀면 다른 쪽도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이 말은 사람을 가려 사귀라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에 묶여 어느 쪽으로 끌려가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말입니다.
-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6:14)
- 바울은 적당히 섞일 수 있는지를 묻지 않고, 애초에 섞임이 성립하는지를 묻습니다.
- 빛과 어두움은 한 방에서 반반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납니다. 이 질문은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누가 계신지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6:16)
- 금지의 이유가 규칙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는가가 나옵니다.
- 깨끗해야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머무시는 성전이기에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6:17)
- 떠나라는 부름에는 곧바로 맞아 주시겠다는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온 사람을 품에 받아 주십니다.
- 구별된다는 것은 외톨이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큰 품으로 옮겨 가는 일입니다.
-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7:1)
- 거룩하라는 권면이 약속 위에 서 있습니다. 약속을 먼저 받고, 그 약속에 어울리게 삽니다.
- 우리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깨끗해지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요 내용
- 무엇에 묶여 걷는지를 살펴야 한다 (6:14-15). 바울은 방향이 다른 것들이 한 멍에에 묶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이다 (6:16). 우상이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서 바울은 교회를 향해 여러분이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고 걸어 다니시겠다는 오래된 약속이 교회 위에 이루어졌습니다.
- 나오라는 부름은 영접의 약속과 함께 온다 (6:17-18). 부정한 것에서 떠나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이 맞아 주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아들뿐 아니라 딸에게도 같은 약속이 열려 있습니다.
- 약속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한다 (7:1). 몸과 마음의 모든 얼룩에서 떠납니다.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을 날마다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 분별은 마음을 닫는 일이 아니라 지키는 일이다 (6:11-7:2 전체의 흐름). 바울은 한편으로 “마음을 넓히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 합니다. 두 말은 부딪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은 사람에게는 넓게 열리고, 우상에게는 단단히 닫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먼저 몸이 움츠러듭니다.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들 가운데서 나오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이 연달아 이어지니, 우리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럼 누구와 거리를 두어야 하나” 하는 계산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천천히 다시 읽으면, 바울의 시선이 사람을 가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문장을 붙들고 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누구를 피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머무시는 이 자리에 지금 무엇이 함께 앉아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상은 눈에 보이는 신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신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본질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앉히는 것입니다. 성공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사람의 인정이 앉을 수 있고, 불안이나 돈이나 끝없이 비교하는 마음이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과 한 멍에에 묶이면, 우리는 그것이 끄는 대로 하루를 걷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같이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방향을 정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 멍에가 되어 있습니다.
멍에라는 그림이 정직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멍에는 혼자서 벗을 수 있는 짐이 아닙니다. 함께 묶인 쪽이 끌면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끌려가고 난 다음에 애쓰라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묶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 손을 잡을 때, 어떤 약속에 이름을 올릴 때, 어떤 습관을 하루의 일부로 들일 때, 그것이 나를 어느 쪽으로 끌고 갈지를 먼저 묻는 것이 분별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 놓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식탁에 앉아도 된다고 했고, 믿지 않는 가족 곁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피해 숨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두운 곳에 들어가 그곳을 밝힙니다. 문제는 빛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에 묶여 빛이 꺼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그 이웃이 섬기는 우상에 함께 묶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17절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나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무언가에서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렵습니다. 익숙한 자리, 함께 웃던 사람들, 그 안에서 누리던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오라는 말 뒤에 곧바로 약속을 붙이십니다. 나오는 사람을 빈손으로 길에 세워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2장의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포로들이었습니다. 떠남은 상실이 아니라 귀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딘가에서 불러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들이 될 것이다. 거룩함에 대한 이 단락의 한가운데에 아버지와 자녀라는 가장 따뜻한 말이 놓여 있습니다. 거룩함은 차가운 규칙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어울리는 자녀로 사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아이는 그 집의 말투와 걸음을 닮아 갑니다. 억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다 보니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순서가 뒤집히지 않는 것이 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깨끗해져야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깨끗해지려 합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거룩함은 끝없는 자기 검열이 되고, 다른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됩니다. 이 순서를 붙들면 거룩함은 사랑받는 자녀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됩니다.
바로 앞 본문에서 바울은 마음을 넓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함께 묶이지 말라고 합니다. 두 말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마음의 모양이 보입니다. 사람에게는 넓고, 우상에게는 좁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삽니다. 사람에게는 문을 닫고, 우상에게는 문을 활짝 엽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 아닌 것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게 하소서. 그리고 그 자리를 비워, 주님이 거하시고 걸어 다니시는 집이 되게 하소서.
내 삶에 적용하기
- 내가 묶여 걷고 있는 것을 적어 보기.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일, 모임, 약속, 습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방향과 반대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사람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라 방향을 보는 시간입니다.
- 내 안의 성전 자리에 앉아 있는 것 하나 이름 붙이기. 하나님 자리에 슬며시 앉아 있는 것이 있다면 정직하게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성공, 인정, 불안, 비교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더 이상 주인 행세를 하기 어렵습니다.
- 믿지 않는 이웃에게 빛으로 다가가기. 이 말씀을 담을 쌓으라는 말로 오해하지 않도록, 오늘 믿지 않는 이웃이나 동료 한 사람에게 친절 하나를 건네 보십시오. 묶이지 않는다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 16절의 약속을 소리 내어 읽기.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행할 것이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 내가 머무는 집과 일터와 길 위에서 이 약속이 사실이라고 믿으며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 약속에서 시작하는 회개 연습하기. 7장 1절은 몸과 마음의 얼룩을 말합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가져가되, 정죄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미 영접하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가져가십시오. 지난 본문 좁아진 것은 내 마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11-13)에서 넓은 마음을 하나님께 구했던 것처럼, 깨끗한 마음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기
- 지금 나는 무엇과 한 멍에에 묶여 걷고 있는가? 그것은 나를 어느 쪽으로 끌고 가고 있는가?
- 나는 “그리스도와 어긋나는 것에서 떠나는 일”과 “믿지 않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일”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내가 가장 쉽게 잊는 순간은 언제인가?
- 하나님이 나를 어딘가에서 불러내실 때, 나는 그것을 상실로 느끼는가, 귀향으로 느끼는가?
- 나의 거룩함은 두려움에서 나오는가, 약속에서 나오는가? 그 차이가 내 삶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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